독일로 들어와 첫 밤을 뮨헨에서 보냈다. 그런데 이 호텔의 아침 BUFFET 가 정말로 좋다. COFFEE 도 미국식으로 준비되어 있어서 아주 좋다.
거리에 심어놓은 가로수를 단단히도 묶어 놓았다. 그러고 보니까 이탈리아를 떠나서 오스트리아, 독일로 들어와서 부터는 도시의 거리, 상점, 식당, 도로등 모든 것이 깔끔하고 정결하다. 심지어는 자동차들까지도 열심히 닦아서 먼지가 더덕더덕 붙어다니는 차를 보기 힘들다.
단단히도 묶어놓았구만.
뮨헨의 님펜부르크 궁전 (SCHLOSS NYMPHENBURG). 루트비히 3세에 의해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따서 건립된 독일 최대의 궁전으로 1918년 왕권이 붕괴되기전까지 바이에른 왕이 여름 별궁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분수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꾸며놓아 바로크 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을 설계했던 카르보네가 설계한 정원에는 소궁전들이 있다.
이탈리아 출신 왕비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서 宮으로 들어가는 길 뿐만 아니라 궁전안에도 많은 인공호수와 강을 만들어 한 때는 '작은 베네치오' 라 불리기도 하였다. 본관에는 루트비히 1세가 궁정화가에게 그리게 한 뮨헨의 미녀 (美人) 36명의 초상화를 전시한 '미인화 (美人畵) 갤러리' 가 있다.\
1385년 이래로 바이에른 왕가와 비테르스바흐 왕가의 궁전으로 쓰이던 레지덴츠 궁전. 지금은 모두 박물관으로 쓰이는데 지금은 수리 중이다.
수리중인 건물을 실제 크기의 그림으로 덧붙여 놓았다.
이 성당은 뮨헨의 신 시청사로 가는 도중에 일행중의 한 분이 급히 근처의 화장실로 간 동안 길에서 모두들 기다리기가 무료하던 참에 마침 옆에 있는 이 성당에 잠시 들어왔다. 일정에도 없는 곳이다. 갑자기 잠시 들어오다 보니 성당 외부의 사진 한 장 없고, 성당의 이름도 모른다. 여하간 갑자기 들어온 이 성당도 대단하다.
이 성당은 현재 로마교황청의 교황인 베니딕토 16세 교황이, 교황이 되기전까지 지내던 성당이다.
이 성당에 마침 히잡을 한 많은 이스람 젊은여성들이 그룹으로 관광을 왔나 보다. 그런데 여행도 남녀가 완전히 따로 다니는지 남자라고는 설명을 하고있는 가이드 외에는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시내의 중심인 마리엔 광장에 있는 신 시청건물 은 지붕 한 가운데에 시계탑이 솟아있는 네오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겉 모습으로는 수 백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것 같지만 실제로는 100여년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건물이다. 중앙의 종루에는 특수장치 인형시계인 글로켄슈필이 매일 오전 11시에 10분간 작동한다. 사람 크기만한 인형들이 출연한다. 처음에는 빌헬름 5세의 결혼식 가운데 실감나는 기마전이 한바탕 벌어진다. 다음에는 1517년 페스트가 만연하여 외출금지 되었던 당시에 페스트가 없어짐을 알리고, 기뻐서 신나게 춤추는 모습이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밀라노를 떠나서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로 가는 도중의 휴식시간에 이야기거리로 즐겁다. 여행할때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면 여행이 더 즐거워진다. 이 분들은 LA 오셨는데 동서유럽을 처음부터 끝까지 16박17일을 우리와 함께 하는 분들이다.
ALPS 산맥을 따라서 줄줄이 펼쳐지는 경치가 아주 멋있고 예쁘게 보인다.
Innsbruck 에 들어와서 첫번째 한 일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이 식당의 지하에 있는 화장실로 내려가는 계단의 중간 기착지 (INTER-MEDIATE LANDING PLACE) 의 이렇게 좁은 공간도 예쁘게 장식해 놓았다.
인스부르크는 눈 덮인 산과 멋있는 시가지의 조화로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절경이다.
황금지붕 (Goldehes Dachl). 인스부르크의 구 시가지에 있는 황금지붕은 고딕양식의 건물의 3층 발코니를 덮고있는 지붕이다. 1420년 티롤 군주의 성으로 지어진 이 건물에 1497년 황제 막시밀리안1세의 지시로 발코니가 만들어졌고 그 위에 2,738개의 도금된 금박을 입힌 항금지붕이 되었다. 2층 난간에는 각 지방의 문장들이 섬세한 띠 모양으로 새겨져있으며, 3층에는 거실용 발코니가 있다. 지금은 이 건물의 내부는 동계올림픽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근처에는 황금독수리 호텔이 있는데 600여년의 유명한 호텔로 1780년에는 괴테가, 1832년에는 하이네가 묵었다 한다.
성 야곱 사원 (DOMKIRCHE ST. JAKOB). 1270년부터 역사에 기술되어 있는 성 야곱교회의 자리위에 만들어진 성 야곱성당은 1724년에 완성되었다. 이 성당은 단조로움 속에 숨어있는 비범한 인상을 더 강하게 풍기는 외형을 가지고 있다. 성당 전면에 타원형으로 나있는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5개는 건물전체에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성당 내부로 들어오면서 엄청난 크기의 화려한 천정그림이 우리를 놀라게한다.
금으로 치장되어 있는 제단과 파이프 오르갠도 웅장하다.
인스부르크는 INN 강에 면하여 있으며, 동부 ALPS 의 교통의 요지로 발전하였다. 구시가지는 이미 12세기에 건설되었다. 1946년과 1976년 두번에 걸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되었던 곳이다.
이 식당 밖에는 1500년대부터 식당에 들린 유명인사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1970년 후반부터는 노르웨이, 스웨덴, 태국의 왕족들 이름이 자주 보인다.
SWAROVSKI의 본점이 여기 인스부르크에 있다. 매장이 1층과 2층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본점답게 휘황찬란하다. 화장실을 찾아서 지하로 내려오니, CRYSTAL 로 입이 떡 벌어지는 EXHIBITION ROOM 을 만들어놓았다. 아래의 사진처럼 같은것을 찍었는데도 수시로 바뀌는 조명으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바꾸어 놓는다.
화장실 역시 SWAROVSKI 의 명성에 걸맞게 간접조명으로 멋지게 만들어놓았다. 유럽을 여행하며 화장실 사진은 이것까지 3번을 찍었다. 이탈리아의 SERVICE STATION 에서 멋있는 꽃들로 장식된 화장실, 그리고 빈의 쉰부룬 궁전의 화장실. 쉰부룬 궁전의 화장실도 간접조명이 인상적이었다.
주차장에서 올려다 보이는 루디비히드1세가 만든 호엔슈반가우 CASTLE. 백조의 성을 만든 루드비히드2세의 아버지가 만든 성이다. 아버지, 아들이 모두 국민의 세금을 마구 낭비했다.
오스트리아에서 국경을 넘어 독일의 FUSSEN 으로 왔다. EU 로 들어서고부터는 국경검문이 없으니 언제 국경을 지났는지도 알 길이 없다.
휴쎈은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작은 도시들이 줄이어지는 로맨틱 가도 (街道) 의 시작점인 동시에 종착점이다. 이곳에 디즈니랜드 의 모델이 되기도 했으며 한국인들에게는 백조의 성 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노이슈반스타인 성 (SCHLO NEUSCHWANSTEIN) 이 있다.
멀리 조그많게 보이는 노이슈반스타인 성으로 SHUTTLE BUS 를 타고 올라간다. 한 5~6분 정도 걸리나.
폭포 위에 만들어 놓은 BRIDGE 인 '마리안 다리' 에서 바라보이는 성은 너무나 황홀하다.
바이에른 왕국의 왕 루드비히2세가 1869~1886년 사이에 건축한 성이다. 음악과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바그너를 돕기도 했고, 그의 오페라
'로엔그린' 중에서 백조의 전설에서 영감을 얻어 성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의 곳곳에 백조의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 많다.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건축하기 시작한 성은 열악한 입지조건과 재정곤란을 무릅쓰고 계속 진행한 끝에 17년만인 1886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그는 3개월 후 STERNBERG 호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여, 루드비히드2세가 거주한 기간은 겨우 3개월 남짓이었다.
이 사진은 현재 우리집 COMPUTER 의 바탕화면이다.
올라갈 때는 버스를 타고 갔는데, 내려올 때는 일부러 천천히 걸어서 내려오면서 보는 경치도 아주 좋다.
밑에서 본 호수보다는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으로 병풍을 두르듯이 있는 호수가 너무 아름답다.
밑에서 본 호수보다는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으로 병풍을 두르듯이 있는 호수가 너무 아름답다.
이탈리아의 MILAN 에서 AUSTRIA 로 넘어오면서 계속 우리 일행을 태우고 다니는 폴란드의 운전기사 아저씨. 아주 점잖은 신사 분이다. 원래가 북미에 사는 폴란드 사람들도 대부분 매우 지적이고 교육열이 또한 대단하다. 우리들의 여행이 끝나는 베르린까지 같이 다니실 분이다.
여러가지 VEGITABLE 이 들어간 CREAM SOUP 인데. 음 음 맛이 아주 좋구나.
저녁이 끝나면 뮨헨으로 가서 지내고. 내일 오전은 뮨헨을 관광하고 오후에는 다시 오스트리아의 SALZBURG 로 간다.
로마에서 피사로 이동한다.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관광날이다. 우리를 1주일 동안 이탈리아를 안내하고 다니고 있는 MR. 高. 성악이 전공이라 그런지 목소리가 깨끗하고 부드럽다. 불필요한 덧붙임이나 쓸데없는 말을 반복하는 일없이 간결하고 알아듣기 쉽게 잘하는 재주도 있다. 게다가 인물도 훤한 미남이니 인기가 좋다. 아무리 보아도 축구선수 안정환보다 더 미남이다. 2002년 서울 월드컵 준준결승 (8강) 2 - 2 연장전에서 헤딩으로 골을 넣어 3 대 2 로 이탈리아를 이겨 우리를 열광케했던 선수. 그리고 그때 안정환은 더구나 이탈리아의 VENICE 프로구단 소속으로 있던 선수였기에 이탈리아에서도 큰 뉴스였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에 살고 있었던 그때의 기분이 어떠했는가 물어본다. 아차. 미스터 高의 봇물이 터졌다. 당시의 한국 골 3개가 들어가는 상황을 비디오 슬로모션 하듯이 자세히 설명을 한다. 아니 이럴 수가..... 알고 보니 이 친구 자신이 축구를 너무 좋아한다. 축구실력도 대단하고. 몇년째 이탈리아의 한인축구협회회장이란다. 미스터 高와 더불어 우리는 유럽여행 기간중에 제일 긴 1주일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즐겁게 마치게 되었다.
피사 대성당으로 가려면 피사 시내 한 곳에서 관광버스에서 내려서,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5분 정도 거리인 피사의 대성당으로 이동한다. 대성당 앞의 셔틀버스 내리는 곳이 소매치기들이 극성을 부리는 곳이라고 여러번 주의를 환기시킨다. 조심해야지... 음 음. 별일 없이 통과한다.
PISA 는 중세에는 해양도시 국가로 군사적, 상업적 입지가 강력했으나, 1905년 이후 휘렌체에 정복되면서 소박한 도시로 변하였다. 아르노강 하구 부근에 있는 오래된 도시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이태리 최고의 조각가 조바니 파사노의 고향이기도 하다.
대성당쪽으로 들어가는 성벽을 따라서 양 옆으로 늘어선 장사꾼들로 남대문시장 장터를 연상시킨다.
성벽 안으로 들어서니 대성당과 세례당 그리고 기울어져있는 피사탑이 보인다. 그런데 이곳은 다른 곳의 성당들과는 달리 아주 넓직한 잔디가 조성되어 있어 건물 전체를 사진에 담기에 아주 좋다.
매년 1mm 씩 기울고 있다는 사탑. 흰 대리석으로 된 둥근 원통형 8층 탑으로 높이는 58m 이다. 294개의 나선형 계단으로 꼭대기까지 연결된다. 1174년에 착공하여 10m 높이에 이르렀을 때 지반이 내려앉아 공사를 중단했다가 다시 계속 건설하여 1350년에 완공되었다. 그후 여러 차례의 보수작업을 통해 기우는 것을 완화하려고 노력했지만 현재까지 여전히 남서쪽으로 계속 기울고있다. 갈릴레이가 이 탑에서 새털과 쇠공을 떨어뜨려서 낙하실험을 한 후에 "지표면 위의 같은 높이에서 자유 낙하하는 모든 물체는 질량에 무관하게 동시에 떨어진다" 는 낙체의 법칙을 발견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PISA 대성당이다. 1063년에 착공하여 1118년에 헌당되었다.
대성당 앞에 독립해서 세워진 세례당. 12~14세기 때에 건축되었으며 설교소리가 구석구석에 전달되도록 음향효과를 계산하여 설계되었다. 내부의 직경이 35m 이다.
기울어진 피사의 탚을 우리가 바로 세워봅시다. 자, 더 힘껏 밀어요. 똑바로 세우고 갑시다.
됐어 됐어. 그만 밀어도 되요. 똑바로 세운 것 같은데. 잘 세웠구나.
멀리서 다시 보니 또 기울어졌네.
PISA 에서 점심을 한다. 아이구 지겨워라! 또 파스타로 시작한다.
마차를 타고 피사 시내를 돌아본다. 30분 동안 태워주는데 30유로를 받는다. 뒤에 보이는 PISA 탑이 똑바로 보인다. 이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탑은 똑바로 서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마차를 타고 가며 주위의 건물들을 둘러보니, 이 건물은 무슨 COLLEGE, 저 건물은 무슨 UNIVERSITY. 수도없이 많은 조그마한 건물들이 모조리 대학들인가 싶다. 이렇게 작은 2~3 층 건물에 왠 대학들이라니......
여기 이 골목도 여기저기 대학이 늘어서있다. 유학생 장사를 하는 대학들인가 ?
피사의 구시가를 지나가는데 이탈리아에 이렇게 한적한 도시가 있었던가 싶다. 왁자지껄한 이탈리아의 도시가 아닌 것 같기만 하다. 오래된 도시라지만 너무나 한적하다.
쥐 죽은듯 조용한 피사 시내.
피사 구 시가지에 있는 광장에 마차를 잠시 세운다. 보통 광장에는 인파가 넘치고 카페가 있고 한데 여기는 조용하다.
다들 모여서 사진을 한장 찍는다. 오늘 투어가 끝나면 서유럽투어만 하시는 분들과 이탈리아만 여행하시는 분들은 북미로 돌아간다. 런던부터 시작해서 동유럽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시는 분들은 우리를 포함해서 7명 이다. 그런데 내일부터의 동유럽투어는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체코를 둘러보게 되는데, 동유럽투어만 하시는 6명의 새인원이 합류한다. 한국에서는 패키지여행을 '굴비여행' 이라고도 한단다. ㅎㅎ 한꺼번에 묶여다니는 이번 굴비여행은 런던에서 20명 (마리) 으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부터는 합튜한 여행객이 늘어서 33명이 되었다가 이제는 26명이 빠져나가고, 다시 6명이 추가로 엮이게 (?) 되어 13명 (마리) 이 동유럽투어를 계속하게 된다.
성당 앞에 이렇게 넓직한 잔디밭이 있는곳은 여기가 처음이다.
성벽 안에도 일렬로 죽 늘어선 기념품가게들.
부엌에서 쓰는 앞치마를 몇개 골라보고.
손녀에게 줄 T-SHIRT 도 고른다.
무슨 기념품을 골랐는지 즉석에서 벌어지는 품평회도 재미있다.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 도시 밀라노로 이동한다. 내일 아침에는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동유럽의 첫 투어를 인스부르크에서 시작한다.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밀라노에서 먹는다. 역시 스파게티로 시작한다. 이탈리아에서의 첫 식사, 마지막 식사를 모두 스파게티로 장식한다. 나는 워낙 NOODLE 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탈리아에서 매일 먹었던 스파게티를 즐기고 떠난다.
카프리 섬으로 접근한다. 카프리 섬은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州의 나폴리만 입구와 쏘렌토 반도의 앞 바다에 있는 작은섬이다. 섬의 인구는 7천 명. 서쪽은 약 600m 의 고지를 이루고 섬 전체는 용암으로 뒤덮여있다. 올리브와 과일등을 재배하며 온난한 기후와 빼어난 풍경으로 유명하다.
로마의 아우구스티누스 황제와 티베리우스 황제가 사랑한 휴양지답게 아름다운 경관과 절벽을 끼고 세워진 조그마한 마을들 곳곳에는 매력이 가득하다. 두 황제의 별장지가 아직도 남아있다. 15세기에 해적을 피하여 높은 지역에 형성된 취락이 현재 섬에 있는 카프리와 아나카프리 2개의 마을의 기원이다. 나폴레옹 전쟁 때에 영국해군에게 점령된 것 외에는 나폴리왕국 또는 시칠리아왕국의 영토였다.
관광객들과 카페로 가득한 부둣가.
작은 싸이즈의 미니버스를 타고 아나카프리로 간다.
조그마한 동네를 잠시 지나더니......
절벽길로 계속 올라가는데 이탈리아의 운전사들 완전히 곡예사 같다. 마구 밟는다. 길은 엄청 좁은데 내려오는 버스와 마주치면 가이드의 표현으로는 깻잎 한장 차이로 지나간다. 급히 멈추어서 서로가 후진, 전진을 하여 겨우 비껴가기를 여러번 한다. 내려가는 버스는 암벽쪽으로 붙어서 내려가지만 올라가는 버스는 바다 절벽쪽으로 붙어서 올라간다. 버스창문 밑을 내려다보면 절벽 밑의 바다물만 보인다. 아찔아찔 정도가 아니라 까무라칠 정도이다. 가이드가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 당부한 말이 떠오른다. 담력이 약한 분은 오른쪽 창가에 앉지 말라고 했던 것 같다. 좁고 좁은 구불구불 절벽길을 미친듯이 질주를 한다. 겨우 (?) 30Km 로 달린단다 !!.여기 보다도 더 아슬아슬한 길이 어디에 또 있을까. 아래 사진의 화살표가 구불구불 절벽길이다. 까마득히 멀리 내려다보이는 바다에는 아주 조그마하게 보이는 요트들도 떠있고.
(빌려온 사진) 화살표가 버스가 마구 달리고 있는 절벽길이다. 이렇게 뱅뱅돌아서 아나카프리 마을로 간다. 정상에 오르는 LIFT 를 타러가는 것이다.
(빌려온 사진)
휴, 휴, 겨우 무사히 올라왔다. 식은땀이 나는 경험이다. 내려갈 때는 암벽쪽으로 붙어서 내려가니까 더 이상 걱정은 않기로 한다.
아나카프리 마을에서 LIFT 를 타고 5분 정도를 올라간다.
LIFT 를 타고 올라가면서 내려다보이는 카프리 섬마을.
솔라로 산 (MONTE SOLARO). 해발 589m 로 높지 않은 산이다. 용암으로 뒤덮인 섬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다.
그림 같은 경치가 한없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풍경은 카메라에 담으면 다 되는줄 알았었는데 여기는 그렇지 아니하다.
정상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씩 마셔본다. 아 ~~ 도저히 카메라로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모두 담는 것이 불가능하다.
BYE, BYE, 카프리. 이런 섬에서는 며칠을 푹 묵어가야 하는것 아닌가. 우리가 나폴리로 떠나는 배를 타러가는데 그 배에서 내려서 섬으로 들어오는 일본인 젊은 커플이 짐가방을 끌고 온다. 며칠 쉬러 오는 것이 무척 부러워보인다.
폼페이에 왔다. 가게마다 ORANGE 를 주렁주렁 매달아놓고 팔고있다. 이 지방의 특산물인가 ? 올리브유가 특산물이 아닌가 ?
지금으로부터 1,928년 전인 서기 79년에 폼페이 근처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하늘로 치솟으며 세상을 뒤덮은 화산재와 분화구에서 시뻘건 용암이 솟구쳐 오르는 순간에 평화롭던 폼페이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끔찍한 현장이 다시 모습을 드런낸 것은 1,70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지난 1709년 4월에 수도원 뜰의 우물작업을 하던 인부의 곡괭이에 쇠붙이 소리가 나면서 발견되었다. 낮은 곳은 2~3m, 깊은 곳은 70~80m 나 화산재로 덮여졌던 폼페이의 폐허는 1748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하여서 꾸준히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옛 시가지의 60% 정도가 현재 발굴된 상태이다.
폼페이는 비옥한 평야의 관문으로 농업, 상업의 중심지로 번창하였고, 나폴리에서 멀지 않은 휴양지로서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제정로마 초기에는 곳곳에 로마 귀족들의 별장이 들어선 휴양지로서 성황을 이루며 살던 곳으로, 당시의 로마인들의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폼페이 인구는 2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베스파시안 신전.
아폴로 신전.
당시에 누운채로 화산재와 용암에 덮혀 비명에 간 시체를 석회를 칠하여 영구 보존하고 있다.
당시의 공중목욕탕.
목욕탕 정면 벽의 조그마한 네모난 구멍으로 STEAM 이 들어오는 훌륭한 사우나 시설을 갖추었고, 벽면 곳곳에는 우아한 조각품들로 장식되어 있다. 이때가 신석기시대로서 한반도의 선조들이 움막에 기거할 때 쯤이다.
그 옛날 1,900년도 더 되는 옛날에 이렇게 도로를 정비하고 수로 (水路) 까지 만들어놓았다.
이곳은 PIZZA 를 만들어 팔던 집이다. PIZZA 를 굽는 화덕이 지금과 똑같다.
당시의 유곽 (遊廓). 남성의 심볼을 조각하여 문 앞에 붙여놓았다. 당시에는 매춘이 당당한 직업이었다 한다. 믿거나 말거나...
돌로 동네의 입구에 만들어놓은 시민들의 휴식처이다. 돌로 반 타원형으로 만들어놓은 벤취라고 해야 하나.
지금도 그대로 선명히 보여주는 벽화는 쾌락적이고 향락적인 당시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LOS ANGELES 에서 오신 Mr. Lee 부부와 폼페이 식당에서 함께 점심 테이블에 자리잡았다. Lee 선배님으로부터 여행을 하는 동안 사진을 찍는 기본적인 기술과 지식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 사진을 취미 정도로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진의 대가이시다.
SEAFOOD SPAGHETTI. 조개, 새우, 오징어. 우와, 맛이 대단하다. 이탈리안들이 좋아하는 칼라마리 (오징어 튀김) 에 새우도 같이 튀겼는데 겨우 작은 것 한 마리만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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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멋있는 폼페이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하고는 Mr. Lee 께서 MP3 를 2개나 넣어놓은 점퍼를 놓고 나오셨다. 여행을 위하여 준비하신 노래와 음악이 2~ 3천곡이나 들어있는데..... 보관하고 있다던 식당으로부터 지금쯤은 받으셨겠지.
폼페이 역에서 기차로 쏘렌토로 이동한다. 이탈리아는 낙서의 천국이다. 아무데나 마구 낙서다. 옛 고전건물의 벽, 기차역 표지판, 베네치아에서는 물 위의 2층집 위에도 마구 그려진 낙서들을 보았다.
SORRENTO에 왔다. 카프리 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 쏘렌토에 왔다. 언덕 위에 보이는 둥그렇게 자라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소나무가 멋있는 경치에 어울려보인다.
"돌아오라 쏘렌토로" 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지 않은가. 1800년도에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는데 쏘렌토 항구를 통해서 떠났다. 그때 구슬피 불려진 노래가 "돌아오라 쏘렌토로" 였다 한다. 이탈리아 본토에 사는 이탈리아 사람은 5,800 만 명이고, 세계 각지에 나가서 사는 이탈리아 사람이 6,400 만 명이나 된다. 아르헨티나 인구의 3분의 1은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쏘렌토 항구의 공원잔디에 악보를 만들어 놓았다.
아름다운 쏘렌토. 인구 1만7천 명. 절벽 위에 세워진 건물들, 절벽 밑의 항구, 모두가 그림같이 아름다운 곳이다. 쏘렌토는 초기에 그리스 사람들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드디어 로마에 왔다. 스페인 광장 (PIAZZA DI SPAGNA). 17세기에 교황청의 스페인 대사가 이곳에 본부를 두면서 스페인 광장이라고 불린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여 유명해졌으며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
광장 중앙에는 베르카치아 분수가 있다. 물에 반쯤 잠겨있는 모습의 물이 새는 배를 본뜬 것으로 베르카치아는 '쓸모 없는 오래된 배' 를 의미한다.
콘도티 거리 (VIA DEI CONDOTTI). 로마의 패션과 보석의 중심지로 1905년 명품보석 불가리가 개점하면서 명품거리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광장 앞에 붙어있다. LOUIS VUITTON 도 보이고.
트레비 분수 (FONTANA DI TREVI). 분수의 도시로 알려진 로마의 분수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다. 베르니니의 원안 (原案) 에 따랐다고 하는 살비의 대표작으로 1732년 착수되어 살비가 죽고난 후인 1762년에 완성되었다. 흰 대리석 작품으로 거대한 반인반수 (半人半獸) 의 해신 (海神) 트리톤이 있는 전차위에 해신 (海神) 넵투누스 조각상이 거대한 조개를 밟고 서있으며 주위의 큰 바위돌 사이로 끊임없이 물이 흘러나와 연못을 이룬다. 이 연못을 등지고 서서 동전을 던져넣으면 다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다고 하는 속설이 있다 한다. 한번 던지면 로마를 다시 방문하고.... 2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3번 던지면 이혼을 한다고 하던가... 엄청난 인파에 비까지 끼어들어 우산을 든 관광객들로 북새통이다. 인파를 뚫고 들어가 동전을 딱 한번만 던졌다 !!!
분수 앞 번잡한 곳에 세워놓은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왜 하필이면 이곳에 이런 것을 만들었나 하며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입을 열고 말을 하고 있다. 여신상 옆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에게 돈을 놓고 가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발 밑에 돈 깡통도 놓고 장사를 하고 있다. 한쪽 팔을 계속 높이 치켜들고... 얼마나 팔이 아플까.
비토리오 엠마누엘레2세 기념관 (MONUMENTO DI VITTORIO EMMANUELE). 비토리오 엠마누엘레2세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룩한 이탈리아의 초대 국왕이다. 이 기념관은 1911년에 완공되었다.
포룸 로마눔 (FORO ROMANO). 포룸은 고대 로마도시의 공공광장을 말하는데 집회장이나 시장으로 사용되었다. 주위의 신전, 교회당, 도서관, 목욕탕들과 함께 도시의 중심적 시설을 형성하였다. 중앙에는 전승 기념비등이 세워졌다. 이들 시설 전체를 통상적으로 포룸이라 지칭한다.
콜로세움 (COLOSSEO). 콜로세움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의 하나이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근처에 네로의 거대한 동상 COLOSSUS 이 있었던데에서 유래하지만, 본래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스 원형극장 이다. 플라비스 황제 때에 세워진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1,928년 전인 서기 80년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되었다. 콜로세움은 로마가 4세기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사용하지 않기 시작하면서 지진과 무관심 속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세에는 큰 건물과 교회를 짓기 위한 채석장이 되면서 외벽이 많이 훼손되었다. 우리 일행이 콜로세움으로 이동할 때부터 퍼부은 폭우로 콜로세움 안을 둘러볼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퍽이나 아쉽다. 그래도 트레비 분수에 등을 지고 서서 동전을 딱 한번만 던지고 오지 않았던가...
바티칸으로 이동한다. 오전 시간대에는 바티칸 궁벽 옆으로 엄청 많은 사람들이 길고 긴 끝없는 장사진을 이룬다고 한다. 입장하기 위하여 30분, 한 두시간은 보통 기다린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패키지팀들은 점심시간이 한참을 지난 시간부터 온다고 한다.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붐주히 매표소로 걷고있지만 길게 늘어진 줄은 없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바티칸 궁전의 입구이다. 입장료는 14유로. 비행기 탑승 때와 비슷한 가방검사도 받아야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니 '솔방울 정원' 으로도 불리는 피냐 정원이 나온다.
정원 곳곳에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을 설명하고 있는 설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벽화가 있는 시스티나 성당안에서는 엄숙하고 조용해야 하므로 여기서 먼저 설명을 듣고 가도록 배려해놓았다.
정원에서 바티칸의 미술관으로 들어왔다. 듣기로는 엄청 많은 인파로 밀려다니다시피 한다고 알고 왔는데 시간을 잘 맞추어와서 이렇게 여유롭게 관람하는 호사를 누리는 기회도 맛보았다. 역대 로마교황들이 수집한 미술품, 조각품, 고문서 등등으로 채워져있다. 미술관이라 불리지만 미술관, 도서관, 유물관, 회화관 등을 합하여 불린다. 미켈란젤로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긴다.
벨베데레 의뜰. 교황 인토켄티우스8세를 위해서 지은 별장의 중심에 있다. 로마시대의 유명 조각상들이 진열된 곳으로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웃,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라오콘이 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유명한 조각품들로 채워진 벨베데레의 정원.
미켈란젤로의 라오콘.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이 비밀을 누설한 죄로 벌을 받아 두 아들과 함께 뱀에게 잡혀서 죽어가는 조각품.
구하기 매우 어려운 희귀한 붉은 대리석으로 만든 네로가 사용하던 욕조.
성당의 통로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위로는 천장의 그림들, 밑으로는 걷고 있는 바닥 복도에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치장, 옆으로는 양 벽을 따라서 진열된 조각품들. 충격을 받는 느낌이다.
각종 색깔의 대리석으로 치장된 복도.
라파엘로가 디자인한 성화를 내용으로 하는 커다란 카피트, 세레요한의 목을 들고있는 메디나 등의 예술품이 계속 이어진다.
대리석으로 모자이크된 복도 바닥.
천정에 그려진 그림들. 이곳을 통과해서 시스티나 성당으로 들어간다.
시스티나 성당 (빌려온 사진). 사진촬영불가 그리고 소음도 철저히 금지된 구역이다. 사진을 한장도 촬영을 할 수 없어 POST CARD 의 사진을 옮겨보았다. 미켈란젤로가 1508년부터 4년간에 걸쳐서 1,300 평방m 의 천장에 '천지창조' 그리고 전면에 보이는 벽에 '최후의 심판' 을 그렸다.
(빌려온 사진) 책에서 그림으로 보던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이다.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 의 일부분.
시스티나 성당을 나와서 성 피에르트 (베드로) 성당으로 향한다. 아직도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그림들로 압도되어 있어서 멍멍한 기분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다른 충격의 장소로 옮겨가는 것도 모르고...
정면으로 바라본 성 피에르트 성당 내부. 대단히 위압적이고 기둥은 천개라고 불리는 청동기둥이다. 이 기둥 가운데서 교황이 미사를 집전한다.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성 피에르트 (베드로) 의 옥좌라 부른다.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옆으로 12사도를 의미하는 12갈레의 빛이 뻗고있다.
안치된 교황.
성당내부는 밖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상상을 하지도 못할만큼 넓고 큰 규모에 놀란다. 성당 내부 곳곳에 보이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치장에 다시 놀란다.
각종 색깔의 대리석으로 조각되었다. 온갖 좋은 것들과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치장된 성당은 대단히 위압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곳이나 화려한 궁전 뒤에는 백성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듯이...
성당을 나오니 바티칸을 지키는 근위대들이 근무교대를 하고 있다. 바티칸을 지키는 근위대들은 지금도 스위스 용병들이다. 역사적으로 용감히 교황을 지키는데 용맹을 떨친 스위스 용병들이 교황청 수비를 담당한다. 입고있는 오렌지색의 제복과 구두는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것으로 지금도 그 디자인을 수백 년간 계속 사용하고 있다.미켈란젤로..... 미술가, 조각가, 건축가, 제복의디자인까지......
성 피에트로 (베드로) 성당의 정면. 가톨릭의 총본산으로 유럽 역사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4세기의 바실리카식의 성당으로 16세기에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 건축가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은 르네쌍스의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재건되었다. 헌당식은 1622년에 거행되었다. 성당의 정면의 윗 부분의 중앙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11명의 제자들의 석상과, 오른쪽 끝에 유다 대신 제자로 뽑힌 마티아의 석상이 있다.
성 피에르 광장. 로마를 자신의 조각품으로 장식했다고까지 전해지는 베르니가 1656년부터 12년 간에 걸쳐서 완성했다. 원주 (原柱) 284개 각주 (閣柱) 88개가 테라스를 떠받치고 있다. 테라스 위에는 성인, 교황 등의 대리석상 140개가 들어서있다.
여기 표시된 곳에서 기둥들을 보면 일렬로 서있는 기둥들의 맨 앞의 기둥만이 보인다.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나에게는 로마의 충격이었던 하루였다. 내일의 일정을 보니 매우 바쁘게 되어있다. 남쪽으로 내려가서 폼페이를 구경하고 카프리 섬으로...
휘란체 (FLORENCE) 로 가다가 SERVICE STATION 에서 잠시 쉬어간다. 긴 여행을 하다보니 장난기가 발동한다.
찬란한 르레쌍스의 중심지이었으며 13~15세기의 예술작품이 많이 남아있는 휘란체는 레오나드 다빈치, 미켈란 젤로, 카사 단테 등 이탈리아의 천재들을 같은 시기에 배출한 도시로서 시가지 중심부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과도 같다. 전통적으로 이름 높은 손으로 만드는 가죽제품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 도시는 좁은길에 기막히게 주차된 자동차, 오토바이들, 그리고 마구 쓰여진 낙서들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여놓은 자동자들 때문에 길을 건너려면 멀리 돌아서 건너야하는 경우도 종종 나온다.
산타 크로체 성당 (BASILCA DI SANTA CROCE). 이 성당에는 단테의 무덤, 미켈란젤로의 무덤이 있다.
산타 마리아 대성당 (SANTA MARIA DEL FIORE). 휘란체의 꽃의 성당이라고도 불리운다. 1296년 아르놀프 캄비오의 설계로 착공되어 그후로 많은 건축가들이 이어 받아서 계속된 공사는 1434년 정탑 (頂塔) 부분만 남기고 공사를 마치었다. 당시는 페인트와 같은 안료가 없었기 때문에 흰색과 핑크, 녹색 대리석을 사용하여 외관을 조화롭게 구성하였다. 이들 색깔로 조화된 외관은 장엄하면서도 꽃의 산타 마리아 성당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굵은 8개의 대리석 사이를 메우는 벽돌로 된 공 모양의 삼각형이 멋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고, 풍부하고 힘찬 외관은 휘란체 市의 상징이 되었다. 1334년 완성된 종탑은 지아토의 작품이다.
성 조바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 대성당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다. 휘란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건축물로 4세기에 건조되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8각형 건물이며 11~13세기에 대리석으로 건물전체가 단장되었다. 3개의 출입문에는 부조판 (浮彫鈑) 이 끼워져있는 청동문짝이 있다. 남쪽문, 북쪽문이 있고 성당과 마주한 문이 사진의 동쪽문 이다. '천국의 문이라 불린다. 천국의 문은 기베르티의 작품으로 구약성서를 상징하며 르네쌍스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 같다" 라고 감탄하였다 한다.
이탈리아의 대시인 CASA DANTE 가 태어난 집.
지금은 단테 박물관이다. 1265년 휘란체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단테는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나 휘란체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투쟁에 나섰다가 재판에 회부되어 벌금형과 2년간 추방령을 선고받았다. 벌금을 내지않은 그에게는 다시 영구적인 추방령과 함께 휘란체에 다시 발을 들여놓으면 화형에 처한다는 선고를 내렸다. 20여년간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유랑하던 단테는 1321년 라벤나에서 生을 마감했다. 유랑생활 동안 그는 '지옥, 연옥, 천국' 의 3부로 이루어진 위대한 문학작품 '신곡' 을 완성했다. 우리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열흘이 지난 2008년 6월18일 뉴스에 단테의 이름이 올라와있다. - 이탈리아의 휘란체 시의회는 이번주 초에 단테를 휘란체에서 영구히 쫓아낸 1302년의 추방형 선고를 취소하기로 19 대 5 로 705년 전의 판결을 철회하는 동의안을 가결시켰다.-
단테의 동상 밑의 길바닥에 물을 부으면 이렇게 단테의 얼굴 형상이 나타난다.
시뇨리아 광장 (PIAZZA DELLA SIGNORIA). 광장에는 휘란체를 일으킨 코지모 메디치의 동상, 미켈란젤로의 동상인 다비드의 모조품등, 르네쌍스시대의 걸작 모조품들로 가득히 채워져있다.
여기저기 너무나 많은 조각들이 서있고 동상들이 널려져있어서 관광객들이 거의 대부분 아무곳이나 주저앉아 쉬고있다.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 모두가 역사적인... 예술적인이니.... 모두들 흥미를 잃었나 보다. 널려있는 조각, 동상에 우리도 거의 질려있는 상태이니. 젊은 10대, 20대들은 오죽하겠는가.
조각품 배경이 아니고 흥미를 잃고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젊은 관광객들을 배경으로......
수세기 동안 휘란체의 정치, 사회적 중심지였던 이 광장은 현재는 카페 테라스로 뒤덮힌 휴게장소이다.
아르노강 오른쪽 언덕 위에 있는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내려다본 휘란체 전경.
몇시간전에 여기에서 무슨 음악회가 열렸다던가. 그래도 그렇지. 이 쓰레기들이 무슨 꼴인가.
이런 것을 두고 엉망진창 이라고 하던가.
1871년에 조성된 미켈란젤로 광장.중앙에는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서 세워진 다비드의 복제품이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광장 멀리있는 소나무들은 모두 천성적으로 위로 둥글게 자란다. 이탈리아 곳곳의 소나무가 모두 이렇게 자란다.
TOSCANA 지방의 온천지대 휴양지인 키안치노에서 오늘밤을 지내고 내일은 로마로 간다.
오늘은 포도주도 나오고.
음. 역시 이곳도 이탈리아. 쌀밥에.... 베이콘으로 덮인 소고기. 맛있고 멋있는 저녁이구나. 내일은 마침내 로마로 들어가겠지.
베네치아에 도착하기전에 점심을 한다. 역시 스파게티가 APPETIZER 로 나온다. 앞으로 여러날 엄청 먹고 다닌다.
PIZZA 에 들어가는 앤초비보다는 엄청 크지만 이름을 모르는 작은 생선, 몇가지 채소를 함께 데친 것이 한국의 우거지와 비슷하다.
배를 타고베네치아 (VENICE) 로 들어간다. 베네치아는 서기 567년에 이민족에 쫓긴 롬바디아의 피난민이 해변가인 베네치아만 안쪽의 LAGOON 에 118개의 섬들을 400개의 다리로 이어서 마을을 만들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바퀴달린 교통수단은 전혀 없다. 오로지 배로 모든 교통수단이 이루어진다. 수상경찰, 수상버스, 수상앰뷰런스 등. LAGOON 의 모래지역이었던 곳에 들어섰기 때문에 지반이 약하여 오랜 세월이 흐르며 서서히 진행되는 지반침하와 오염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베네치아는 비잔틴의 지배를 받으면서 급속히 해상 무역의 본거지로 성장하여 7세기 말에는 무역의 중심지로 알려졌고 강력한 베네치아 공화국이 되었다. 10세기 말에는 동부 지중해지역과의 무역, 마르코폴로에 의한 동방과의 무역으로 경제적 번영을 누리면서 가장 부강한 도시공화국으로 성장하였다.
음악가 안토니오 비발디가 살았던 집.
LONDRA 궁전.
탄식의 다리. 두갈레 궁전과 작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있는 감옥을 잇는 다리이다. 죄인들은 누구나 이 다리를 지나서 감옥으로 수감되었는데 다리의 창문을 통해 밖을 보면서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탄식을 하였다 한다. 세기의 난봉꾼 카사노바가 수감되었던 감옥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이 감옥을 탈출한 유일한 죄수도 카사노바였다.
성 마르코 대성당 (BASILICA DI SAN MARCO). 한국인들에게는 마가의 성당. 마가복음을 전한 마가 (MARCO) 의 유해를 모셔놓은 곳이다. 이 성당은 2명의 베네치아 상인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마가의 유골을 돼지고기로 덮어서 몰래 훔쳐와서, 납골당으로 832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후에 성 마르코 (마가) 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성인 (守護聖人) 이 되었고 11세기 말에 현재의 성 마르코 성당이 세워졌다.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십자형의 바실리카로 5개의 동방적인 돔을 받치고 있다. 총독을 비롯한 시민들은 동방을 침략할 때마다 성당을 장식할 여러가지 물건과, 조각상 (彫刻狀), 부조 (浮彫) 등을 가져오는 습관이 생겨, 성당은 많은 전리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산 마르코 성당의 종탑. 얼마전 하루 아침에 갑자기 폭삭 무너진 종탑 자리에 다시 세운 종탑. 지반이 약해서였던가...
산 마르코 광장. 수많은 비둘기떼와 관광객들로 가득한 곳이다. 동쪽으로 산 마르코 대성당이 있고, 광장 주위는 흰 대리석의 列柱가 줄지어있는 회랑이다. 1797년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점령하였을 당시에 이 광장을 보고는 "유럽에서 가장 우아한 응접실" 이라고 했다 한다.
새들이 사람이 좋아서 올라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초코릿을 손에 들고 있으면 냄새를 맡고 순식간에 여러 마리가 달려와 올라앉는다.
성 마르코 광장의 우아한 응접실 (?) 에 있는 카페에서 흰 양복으로 멋있게 뽑아입은 늘씬한 웨이터가 날라다주는 콜라 한잔을 시원하게 주욱 들이킨다. 8유로나 ($13) 한다. 으악 ~ 우리가 여행중인 2008년 5월은 1유로=US $1.6 유로가가 최고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곤돌라를 탄다. 곤돌라는 이태리 말로 '흔들린다'라는 뜻을 가진다. 관광객 유람용으로 이용되는 곤돌라는 고대의 배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수상도시인 베네치아는 곤도라는 유일한 교통수단 이어서 16세기에는 이미 1만 척에 달하였다. 오늘날은 모터보트의 보급으로 겨우 수백 척 정도가 남아있다.
가이드가 배마다 나누어준 샴페인을 따서 한잔씩 마신다.
배를 저어가면서 뱃사공이 이 집은 누가 살던 집이고 저 집은 누구의 집이었고 하면서 알려준다. 이 건물은 무슨 건물이고.
사공들 뒤로 리알토 다리 (PONTE DI RIALTO) 가 보인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1854년 아카데미아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대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다. 아치 모양의 아름다운 다리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아케이드 점포들이 모여있다.
스위스의 제네바로 떠나기 위해서 새벽부터 난리통 끝에 역에 도착했다. 7시10분 TGV 인데 30분 전까지는 역에 도착해야 하니 6시40분까지 이곳에 오느라고 6시10분에 호텔을 떠났다. 그야말로 군대 입대해서 훈련받던 때가 떠오른다. 오늘도 COFFEE 를 사 본다. 역시 반컵이다. 2.90유로. 작년 3.00유로보다 10Cent 가 싸졌다. 그래도 비싸다. 비싸.
성인 23명. PARIS 에서 GENEVA 까지. USD $1,863 그러니까 1인당 $81 이다. 가이드가 GROUP TICKET 을 나에게 맡겨놓는다. 음.. 꼭 쥐고 있어야지. 잃어버리면 큰 일이다..... 제네바까지 3시간 25분 걸린다. 실제로 우리 GROUP은 20명만 탑승했다. 3명은 미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순간에 여행을 CANCELL 하였나 보다.
제네바에 도착했다. 호수가 공원의 꽃시계. 작년 9월에는 우리가 타고갈 버스가 나타나지 않아서 이곳에서 한 나절을 보냈던 곳이다.
바로 옆의 레만호수. 작년에는 보지 못했던 관광객을 태우고 공원을 일주하는 버스가 등장했다. 그러고 보니 없어진 것도 있다. 호수에서 140m 의 물줄기를 뿜어대던 게토라 불리던 분수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의 한강에 거의 200m 나 뿜어내는 분수가 등장하여 기록을 깨트리자 곧바로 중단되었단다. 믿어도 되는건지.
레만 호수가의 공원.
제네바에서 국경을 넘어서 이탈리아쪽 알프스로 간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조금 끼었지만 바람은 없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난다. 작년 9월에는 청명한 날씨인데도 바람 때문에 끝까지 오르지 못하지 않았던가.
도착해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2번을 더 바꾸어 타고 올라가야 한다. 첫번째 케이블카를 내린곳에 있는 산장에서 점심을 한다.
오늘도 이곳 알프스 산골의 전통 음식이 나왔다. 작년 식당에서는 6가지 고기에 6가지의 소스가 나왔었는데 이 집은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3종류의 고기와 소스는 4가지가 나왔다. 그런데 이 집은 쌜러드가 마음에 든다. 왕창왕창 준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더 올라와서 전망대에 섰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온통 눈이다.
제일 높이 있는 마지막 전망대로 가기 위하여 마지막 케이블카를 타러간다. 일행중 몇명만 마지막까지 도전을 하는 셈이다. 눈도 많고 춥기도 하지만 고지대로 올라가면 호흡이 가빠지고 또한 고공공포증이 계신분들이 빠지다보니 몇명 남지 않았다.
마지막 케이블카는 정원이 6명으로 작은 케이블카이다. ALPS 에서 제일 높은 산인 몽블랑이 4,807 m 이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마지막 전망대가 3,650 m 이다. 백두산이 2,750 m 이던가. 아무튼 높이 올라올수록 머리가 약간 어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호흡이 빨라지는 기분도 난다.
도착하니 방명록이 준비되어 있다. 우리도 몇자 적어본다. " 눈 눈 눈 참으로 반갑구나 "
전망대로 나오니 완전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작년에는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오르지 않았는가. 두손 번쩍들고 사진 한장 찰칵.
알프스를 떠나서 밀라노 (MILAN) 에 왔다. 이탈리아 북부의 비옥한 평야에 자리한 밀라노는 예로부터 교통의 요지이며 우리들에게는 FASHION 의 도시로 더 잘 알려져있기도 하다. 이탈리아 최대의 공업도시인 밀라노는 인구 400만으로 이탈리아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로마와는 다른 근대적인 상업, 공업의 도시이다.
앞쪽에 2차대전전에 쓰이던 60~70년이나 된 구식 전차가 아직까지도 운행되는가 하면, 뒤에는 최신식 전차도 운행된다.
ALPS 에서 내려와 이탈리아에서의 첫 식사. 스파게티가 APPETIZER 로 나온다. NOODLE 을 덜 삶아서 쫄깃쫄깃하게 만든다. 우리가 북미에서 먹는 스타게티는 NOODLE 을 너무 삶아서 OVER COOKING 한단다. 쫄깃쫄깃하게 삶아서 씹는 맛이 있어야 스파게티의 제 맛이 난단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로 씹는 맛이 다르구나. 그런데 스파게티는 이탈리아에 머무르는 1주일 동안은 아침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식사 때마다 열심히도 먹게된다.
밀라노 대성당 .이 성당은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고딕건축 양식으로 1386년 비스콘티 공작의 명에 따라 공사가 시작되어 근 600년 후인 20세기에 완성되었다. 무명의 건축가가 짓기시작한 성당은 1805년에야 성당의 정면이 완성되었다. 1858년에는 첨탑이 완성되었으며, 1905년부터 성당 입구의 청동문과 대리석 부조작업을 시작하여 1965년에야 전체적인 완성이 끝났다. 높이 160m, 넓이 92m의 초대형 성당으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으로 기록되어 있다. 3,159개의 성자와 사도들의 조각들. 사도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은 순교의 장면도 조각되어 있다.
모두 135개나 되는 뾰족한 첨탑이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다. 흰 대리석의 외양과 조각들이 표현하기 어렵게 호화롭다.
성당의 정면.
성당 앞의 두오모 광장 중앙에 있는 이탈리아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2세 기념상.
광장 바로 옆에 있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2세 GALLERIA 아케이드. 고대의 건축물과 근대의 쇼핑이 접한 세계의 아름다운 쇼핑거리의 하나로 꼽힌다.
스칼라 극장 (TEATRO ALLA SCALA). 당시 밀라노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에 따라 교회가 있던 자리에 세운것으로 1778년에 개장되었다. 그후에 2차례에 걸쳐 개조되었다. 성악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서 보기를 열망하는 세계의 유명한 오페라 극장 중의 하나이다.
스칼라 극장 앞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기념동상. 내일 아침에는 우리들은 쉑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이라고 잘 알려진 VENICE 로 간다. 그런데 베니스의 상인을 쓴 쉑스피어는 베니스를 한번도 와 본 일이 없다고 한다.
파리에서의 이틀째 관광을 LUXEMBOURG GARDEN 에서 시작한다. 루이13세의 섭정모후를 위하여 1615년부터 건축된 뢱상부르 궁전에 프랑스식 정원이 있다. 궁전은 지금은 국회 하원의사당으로 쓰인다.
공원 안에는 많은 조각품들이 있다. 한무리의 영국 관광객들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가이드를 보긴 했는데..... 무엇인지....
공원 밖의 철제담장을 따라서 최고의 사진작품 여러개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 기자상을 수상한 작품들이다. 이 사진은 GULF 전쟁 때 폭격당한 건물 앞에서 노인네가 지팡이와 수류탄을 들고서 두손을 치켜들고 있다. 폭격당한 건물에는 2개의 현수막이 보인다. 위의 것은 DEATH TO U.S.A. 아래의 것은 MADE IN USA. 누가 찍은 것인지는 왼쪽 밑에 설명이 있는데 확인하지 못했다.
노틀담 성당 (CATHEDRALE DE NOTRE DAME). 세느강의 시테섬에 있는 노틀담 대성당. NOTRE DAME 은 가톨릭에서 쓰는
'성모 마리아' 에 대한 존칭이며 프랑스어로는 우리들의 '귀부인' 이라는 뜻이다.
뒤에서 본 성당 모습.
오늘은 큰 미사가 있었나 보다.
노틀담 성당을 관광온 일본의 중학생들. 교복을 입고 관광을 나섰다. 아이구, 너무나 더워 보인다.
작년에 노틀댐 성당은 잘 둘러보았으니 이번에는 대강 돌아보고, 성당 주위의 세느강을 거닐어보려고 나선다.
노틀댐 성당 주위를 걷다보니 바로 한블럭 떨어진 곳에 파리의 시청이 있다. 건물 중앙에 있는 시계 밑에는 프랑스 혁명의 3대 정신
'자유, 평등, 박애' 가 새겨져있다.
드골 광장 중앙에 있는 에투알 개선문. 1806년 나폴레옹이 휘하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획하고 시작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1836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여기도 오늘은 큰 행사가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성조기와 프랑스 국기가 보인다.
루브르 박물관 은 원래는 궁전이었다. 역대의 프랑스 왕들, 특히 프랑수아1세, 루이13세, 루이14세 등이 수집해놓은 방대한 양의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프랑스혁명 후인 1793년 그것을 공개하기로 하였다. 그후로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어 현재 약 30만 점의 소장품이 있으며 그중 2만5천 점이 전시되고 있다.
모나리자 앞에는 언제나 많은 인파가 붐빈다.
힘들게 멋있는 사진 한장을 찍는데 성공했다.
무엇이 이렇게 좋으신가..... 이어폰으로 들리는 가이드의 설명이 그렇게도 재미있나 보다.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사크레 쾨르 대성당 (BASIUQUEDU SACRE - COEUR). 1876년에 기공하여 1910년에 완성되었다. 여러 성당의 모양을 본뜬 절충식 성당으로 비잔틴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종루에는 세계최대의 26톤이나 되는 종이 있다. 파리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젊은이들이 차지하고 즐기는 곳이다.
축구공을 가지고 음악에 맞추어서 묘기를 보이고 적선을 구하는 젊은이도 보이고.... 항상 성당 앞은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는 젊은이들로 북적인다.
몽마르트 언덕. 서기 272년 성 도니와 두명의 제자가 순교를 한 언덕으로 순교자의 언덕 (MONT DES-MRTYRS) 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몽마르트 언덕은 19세기 후반이래 고흐, 로트레크, 피카소를 비롯한 많은 화가와 시인들이 모여 인상파, 상징파, 입체파 등의 발상지를 이루었으나 점차 모파르나스로 옮겨갔다. 몽마르트 언덕은 언제나 많은 관광객들로 무척 붐비는 곳인데 봄 계절인 지금의 5월 말의 인파는 지난 가을 9월 초의 인파의 두배는 되어보인다. 엄청 많은 인파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유럽대륙을 휘젓고다니는 때인가 보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
에펠탑에서 만세를 불러본다. 지난번에는 멀리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멋있는 사진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에펠탑 안에서 좋은 사진을 만들고 싶은데 LA 에서 오신 MR. Lee 께서 좋은 사진을 만들어주셨다.
에펠탑에서 TOTONTO 의 우리집까지는 6,014Km.
서울까지는 8,991Km. 평양까지는 8,791Km.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세느 강변과 파리 시내.
저 끝 멀리에는 몽마르트 언덕도 보인다.
너무나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정부건물 앞에 조성한 공원.
밤에 타는 쎄느강 유람선. 오늘은 비가 조금씩 내린다.
비가 조금씩 뿌려도 데이트족들은 그래도 여기저기 보인다. 청춘사업에 비가 무슨 상관이랴. 내일 아침에는 기차로 스위스의 제네바로 떠난다.